하일지
Artist Note
소설을 쓸 때 경험을 고백하자면, 나는 한 번도 미리 구상을 한 적이 없다.
나를 사로잡는 첫 문장이 떠오르면 거기에 이어 두 번째 문장을 쓰고, 두 번째 문장에 이어 세 번째 문장을 쓰고...... 이렇게 자꾸 써 나가다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나 자신도 모른다.
한 달 가까이 집중해서 써나가다 보면 마침내 이야기의 끝이 보이면서 한 권의 장편소설이 완성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나는 어떤 구상도 미리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한 번도 스케치를 한 적이 없고, 스케치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필링이 오면 나는 무조건 붓을 들어 화폭 위에 붓질부터 한다.
나의 붓질이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그리면 거기에 맞춰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과 언덕을 그리고, 필요한 다른 오브제들, 이를테면 언덕 위에 우뚝 선 벽시계와 그 밑에 잠들어 있는 소녀 따위를 그려 넣는다.
이렇게 두어 시간 정신없이 붓질을 하다보면 화폭 위에는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만들어진다.
나는 생각하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필링을 쫓아 그린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