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숙

Artist Note

전시를 앞두고 작업을 시작할 무렵 그리스와 튀르키예로 여행을 다녀왔다. 

태초의 형상 그대로를 간직한 거친 바위산들과 짙푸른 지중해의 물결, 그리고 지상 위에 장대하게 펼쳐진 고대 문명의 흔적들...... 그것은 그곳에 잠시 머물다 떠나간 생명들의 삶이 그려낸 거대하고 황홀한 무늬였다. 

그곳에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은 내 삶의 흔적 속에 환타지로 남겨졌고, 그 기억들은 작업의 모티브가 되어 빈 캔버스를 야성적 에너지로 가득 채워 주었다.

나의 작업 세계에서 외부에 나타나 있는 형상은 무의미 하다. 

내면의 자아를 대면하여 저 깊은 밑바닥에 고여 있는 

의식의 파편들을 끌어내어 빈 여백에 채워나가는 긴 여정인 것이다.

지중해의 깊고 푸른 빛 속에서 아련하게 스며나오는 어떤 죽음을 보거나

죽음에서 고개 들어 삶을 바라본다.

광활하고 밝은 빛 속에서 시작 됐던 모든 것들은 지상의 빛과 함께 일몰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그 깊이를 가늠 할 수 없는 허공만 남아 있다.

별의 궤적을 따라 흐르는 모든 것들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작업하는 동안 내 의식 속에 있던 판에 박힌 어떤 이미지들이 모두 무효화 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순간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며,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무아지경에 이르른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 해내야 하는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황홀하기도 한 시간들 속에서 사회가 제시하는 ‘질서’ 그 동일한 삶을 탈피하고자 나는 오늘도 작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