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연
Artist Note
또 하나의 틀로부터의 해방
유독 사람들은 나를 ‘장갑의 작가’라고 부른다. 한때는 이런 호칭이 내겐 별로 달갑지 않게 들렸으나, 수많은 세월 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지위를 확고히 굳힌 ‘섬유 예술’, ‘섬유 조형’이란 용어처럼 이제는 ‘장갑의 작가’라는 별명이 그다지 거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십여 년 이상 나의 조형 추구의 단서로서 함께해 온 장갑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의미가 있기도 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대꼈던 미국 유학 생활 동안 행여 손이 틀 새라 어머니께서 기도와 함께 사랑으로 보내 주신 면장갑을 받았을 때,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따스한 감흥에 젖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이 면장갑은 마음의 깊은 뿌리가 되어 커다란 나무로 만드는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 장갑 가지가지마다 돋아난 생명들, 그 자체로 진실된 손, 손, 손들…. 많은 날들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손,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치며 두꺼비 노래를 부르던 고사리손, 저문 강가에서 황토 흙 묻은 삽을 씻어내고, 논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손, 큰 손주의 아픈 배를 만지며 빨리 나아 달라고 비는 할머니의 약손….
삶의 벅찬 순간에서부터 무욕무심의 순간에까지 그것들을 담아보고자 했던 바람으로 시작한 나의 장갑 작업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구획되어 정해진 ‘사각의 틀’을 벗어나야 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장갑이 고식화된 단위의 형태가 되지 않게 하려는 조형 연구는 장르의 개념을 넘어선 나름대로의 표현 방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조형의 유희는 아니다. 오늘날을 사는 한 인간으로서 작가에게 부딪쳐 오는 그것들이 과거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물음의 시도는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 신화라는 색채를 띠고 있을 때라도 작품에 내재하고 있다. 또한 한 작가의 진정한 생명력으로서 끊임없는 조형 세계의 자기 확인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